작가 이름만을 보고 무조건 신간을 구입할만한 작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무척 행복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 경우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런 작가에 해당됩니다. 중간중간 거쳐갔던 몇몇 작가들과는 달리 80년대 말에 만나 인연을 20여년 넘게 지속해오고 있으니 앞으로도 어떤 흥미로운 만남이 이어질지 기대됩니다.
<승리보다 소중한 것>은 하루키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참석하며 쓴 이른바 참관 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2001년에 <Sidney!>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국내에서는 북경 올림픽에 즈음하여 좀 늦게야 출판되었습니다.
일단 정말 재미있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고 가벼운 이야기 속에 묵직한 감성을 담아내는 그의 절묘한 특성이 이 책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올림픽 자체에 대한 참관기보다는 역시 하루키답게 주변 상황에 대한 묘사나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구구한 감상후기보다는 그냥 기억에 남는 문장 몇 개 남기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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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42킬로미터의 코스 중에서 유일하게 골치 아픈 지점이 있다. 달릴 때마다 힘겨웠던 지점이다. 왠지 매끄럽게 오를 수 없는 오르막이어서 그 지점을 생각하면 기분이 다운되곤 한다. 하지만 경주 당일에는 그 지점을 통과한 것조차 몰랐다. 해바라기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 지점을 달릴 때 커다란 해바라기 간판이 보였다. 선명한 노란색 간판. 해바라기는 그녀가 좋아하는 꽃이다.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한 홋카이도 마라톤에서도 해바라기는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어 자주 해바라기를 보내 준다. 누군가가 나를 응원하기 위해 도로변에 해바라기 간판을 만들어 준 것이리라. 우와, 엄청나게 크구나!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마가린 광고 간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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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러데일 동물원은 블랙타운 역 근처에 있지만 차를 빌려서 가는 게 편리할 것이다...... 입구에 `캥거루를 풀어 놓은 구역`이라는 푯말이 있다. 그러나 캥거루들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구역에 모여 있어서 쉽게 만질 수 없다. 인간에게 질린 듯한 표정이다. `이놈들 정말 지겹군. 빨리 해가 져서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것도 서비스업이니 반갑게 맞아 주자!` 이런 마음가짐의 캥거루는 한 마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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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애당초 개회식따위엔 거의 관심이 없었다.티켓값은 10만 엔이나 한다......"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것을 꼽으라면, 올림픽 개회식은 분명히 10위 안에 들 것이다."......이벤트가 진행되는 동안 흥미를 끈 것들.
1. 처음에 말이 많이 등장했는데, 똥은 안 쌌을까? 아주 많은 말이 나왔으니 똥 싼 녀석이 한 마리 정도 있을 법한데.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똥을 싸지 않도록 특수한 약이라도 먹인 걸까?
2. 커다란 장치를 움직이는 동안 뭔가에 걸렸는지 갈색 시트가 벗겨진 곳이 있었다. 직원이 달려가 붙이려고 애를 쓰지만 잘 안 붙는다. 뒤에서는 다음 순번자들이 다가오고. 안쓰러웠지만 볼 만했다. 이런 소동이 TV 카메라에 잡히지는 않겠지.
3. `The Symphony`에서 호버크라프트 비슷한 탑승물에 탄 남자들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중 하나가 멈춰 버리는 바람에 이걸 타고 있던 남자는 낑낑 밀면서 돌아갔다. 꽤 무거워 보였는데. 이것도 TV에는 안 나왔을 듯.
TV로 보는 것보다 재미있다고 느낀 건 이 정도. 요점은 `타인의 실수는 보고 있으면 즐겁다`는 것. 이 이벤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디즈니랜드의 의뢰를 받아 연출한 바그너의 악극` 같았다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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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뉴스에 의하면 공항에 도착한 일본인들은 시합이 시작되기 전까지 코알라를 구경하러 간다고 한다. 낮엔 코알라, 해가 지면 축구. 우르르 몰려다니며 이상한 곳에 가는 것보다는 건전하다. 통계에 의하면 일본인이 호주로 오는 동기는 귀여운 동물을 만져 보는 데 있다고 한다. 개중에서도 코알라는 압도적으로 인기가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일본인은 코알라를 껴안고 사진을 찍기 위해 호주로 온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코알라는 신경이 예민한 동물이어서 쉽게 트라우마를 겪는다.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껴안고 쓰다듬고 떠들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사회 복귀`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는 코알라를 껴안으면 안 된다는 법률, 이른바 `코알라 껴안기 금지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률이 통과되기 전에는 코알라 한 마리가 한 시간에 200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안겼다고 한다. 이건 정말 심한 듯. 나라도 미쳐버릴 것 같다. 그런데 이 법률 덕분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뉴사우스웨일즈에 오지 않게 되었다고. 코알라를 껴안을 수 없으니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사람들은 모두 `코알라 껴안기 금지법`이 적용되지 않는 퀸스랜드로 가 버렸다.......코알라들은 꽤 시달렸을 거다. 지금쯤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고 있을지도. 원형탈모, 소화불량, 변비, 야뇨증, 발기부전, 갱년기장애, 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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