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오래 전에 사두었던 시공 디스커버리 책들을 다시 꺼내 읽고 있습니다. 부피 작고, 사진 많고, 글씨 적고, 한 번 읽었던 것들이라 내용 놓칠 염려 없고... 출퇴근 시간이나 그 밖의 자투리 시간에 읽기에 아주 좋습니다.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 책들이 소책자치고는 비싸다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실속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도 그렇습니다. 150여 페이지에 사진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텍스트로 된 원고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시각이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저자 아르노 메를랭은 프랑스에서 재즈 잡지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사람입니다.
다만, 재즈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소책자 형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묘미를 제대로 즐기려면 책으로든 음반으로든 꽤나 튼튼한 재즈 내공이 쌓여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책은 길 에번스와 비밥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한페이지를 채 넘기지 않은 채 바로 쿨 재즈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저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시각으로 재즈의 역사를 짚어내며 완급을 조절해 나갑니다. 그의 시각 중에 공감할 만한 부분이 많습니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 시기의 또 다른 스타 트럼펫 연주자인 디지 길레스피와 비교할 때 대가다운 기교라든가 화려한 맛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소박하고 경쾌하며 사려 깊은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조용한 울림이 특징이며, 고음을 피해 중간 음역을 선호하는 것이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마치 디지 길레스피의 빠른 연주에 "침착해."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레스터 영이 성미 급한 콜맨 호킨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흉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 초기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반에 대해서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1949년 캐피틀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할 때 마일즈 데이비스는 알토 색소폰을 부는 리 코니츠를 솔로 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청했다. 코니츠는 그의 중요한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성공할 것 같지 않은 후보자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비밥 색소폰에서 우디 알렌이 미국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것과 비슷한 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즉 비밥이 다양한 얼굴을 자랑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코니츠는 얼빠진 학생처럼 창백한 얼굴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연주 또한 얼굴과 아주 흡사했다. 그는 레스터 영과 레니 트리스타노의 프레이즈의 영향을 받아 찰리 파커의 현란함을 약간 다소곳하게 만들었다."
--> 코니츠와 우디 알렌 두 사람의 얼굴 모습이나 작품 세계를 떠올리며 빙그레 웃음짓게 만드는 비유입니다.
"1954년 12월 24일에 두 사람이 한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연주가 시작되고 한동안 몽크의 이상한 하모니에 고전하던 데이비스의 입에서 자신이 솔로를 하는 동안 피아노는 조용히 있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데이비스는 차라리 더블 베이스 반주로 혼자 연주하는 것이 더 좋았고,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스튜디오에서의 한 시퀀스와 그들의 연주가 오버랩되며 고객를 끄덕이게 만들어줍니다.
"하드 밥은 시끄럽고, 최대 음량까지 구사하는 악기 소리와 감성적인 연주가 특징이었다. 하드 밥은 미국 흑인 음악의 뿌리인 블루스와 흑인 영가로 돌아가는 기회였다. 동시에 모던 재즈의 전위적인 면에 혼란을 느끼던 흑인 청중들과의 유대를 새롭게 다지는 기회이기도 했다."
-->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드밥에 대해 명쾌한 정리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윙은 3분할 프레이징의 비대칭성과 관련이 있었다. 즉 마디의 3분할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박자의 3분할과도 관련된 용어이다. 클래식 음악가들이 두 개의 동등한 박자의 음을 연주하는 곳에서 재즈 연주가들은 첫번째 음을 길게 늘인 다음 두번째 음을 급히 연주함으로써 탄력감과 공명감을 강조했다. 2분할 프레이징은 쿠바 흑인 드럼의 대칭잡힌 드러밍과 함께 길레스피의 재즈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만들어냈다."
--> 디지 길레스피와 동시대 음악인들의 스윙에 대해 정말 잘 묘사해준 것 같습니다.
결론은 재즈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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